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프 스틸웰 (문단 편집) == 생애 == 1883년 [[플로리다]]에서 출생했다. 1904년 [[미국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도중 화약고 폭발 사고로 눈에 큰 상처를 입었다.[* 왼쪽 눈은 완전히 실명했으며 오른쪽 눈은 두꺼운 안경이 필요했다.] 그 이후 톈진 조계지 주둔 [[미 육군]] 지휘관, 주중 미국 공사관 [[국방무관]] 등으로 [[중국]]에서 10여년을 복무했다. 이 덕분에 표준 중국어에 매우 능통했지만, 계속된 내전으로 초토화되는 중국의 혼란상을 경험하며 중국에 대한 편견과 혐오도 커졌다. 스틸웰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퇴역을 앞둔 육군 [[중장]]이었는데, 전쟁 발발로 인해 퇴역을 연기하고 [[북아프리카 전선]]에 파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장제스]]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대통령]]에게 [[미국-대만 관계|미중관계]]의 강화를 위해 미국인 [[참모장]]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중국어]]에 능통한 스틸웰이 당초 예정되었던 북아프리카 대신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스틸웰은 대규모 부대를 다룬 경험이 없었고 성향도 무모할 정도로 공격적이었다. 그 때문에 [[버마]] 전역에서 패배하는 등 전과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적을 너무 얕잡아보는 성향이 강하여 창더 전투, [[대륙타통작전]]의 파멸적 피해를 야기한 바가 있다. 이러한 성격적 결함으로 인하여 중국은 물론 영국 및 같은 미국인들과의 마찰도 극심했다. 1943년 스틸웰은 [[인도]]에서 육성한 중국 육군 정예군인 X군과 영국군, 미 육군 메릴 부대, Y군과 연합, 버마를 탈환함으로 그나마 설욕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중국군 지휘권을 가지려는 욕심을 부리다가 분노한 장제스에 의해 해고당하고 [[앨버트 웨드마이어]]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1944년 8월에 육군 [[대장(계급)|대장]]으로 진급[* 이 시기 스틸웰은 2차대전 미 육군에서 임명된 전시 대장급 장성 16명중 진급서열 4위였다. 선임자는 더글러스 맥아더(남서 태평양 전구 사령관/41년 12월-최초 전시 진급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북서 유럽 전구 사령관/43년 2월), 헨리 아놀드(육군항공대-공군참모총장/43년 3월)로 44년 연말에 모두 원수로 진급했고, 다른 대장 12명은 45년이 되어야 우르르 진급했으니 사실상 4성 장군 No.1이었던 것이다. 스틸웰이 유독 빠르게 대장으로 진급한 것이 어떤 능력적 고평가를 받아서인지, 연공 서열이 높아서인지, 동맹국 군대와의 관계를 고려한 격식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미 육군 지상군 사령관[* [[레슬리 맥네어]] 중장의 후임이었다.], 제10[[야전군사령관]][* [[오키나와 전투]] 막바지에 전사한 사이먼 버크너 중장의 후임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단 실제 전투는 10군 예하의 3상륙군단장이었던 로이 가이거 해병중장이 스틸웰 부임 전 야전군사령관 대행으로 마무리 지었고, 스틸웰은 전투 종료 후의 행정 처리를 맡았다. 참고로 로이 가이거 중장은 유일하게 야전군을 지휘해본 해병대 장성으로 이름을 남겼다.] 등을 거쳐 종전을 맞이했다. 종전 후 중국을 방문하려 했으나 장제스에게 입국 거부당했다. 일본의 항복 이후에 [[미군정|남한 군정사령관]]이 될 뻔했으나 장제스가 반대하여 [[존 리드 하지|하지]]가 대신 군정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자서전을 집필하려 했으나 미완성 서문의 초고만 여러 개 만든 채 1946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중국 측에서도 어쨌든 미우나고우나 함께 싸운 연합국 장군이었기에 칭호를 서훈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